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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선수 김행직

유용한 정보/당구소식

by 당구소녀 2023. 8. 8.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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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1992. 3. 31. (2023년 현재 31) 경기도 
신체180cm, 68kg
소속전남당구연맹

 

2010년, 2011년, 2012년 세계주니어 3쿠션선수권대회에서 우승

2015년 제7회 아시아 3쿠션 당구 선수권 대회에서 역대 최연소 아시아 챔피언

2017년 포르투 월드컵, 2017년 청주 직지월드컵에서 월드컵 2회 연속 우승(만25세 나이에 당구월드컵 우승 기록 수립)

2019년 10월 네덜란드 베겔 3쿠션 월드컵에서 우승

 

김행직은 어쩌면 그 이름에서부터 운명적으로 당구와 인연을 맺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행직(幸直). 바르고 곧게 살라는 뜻에서 지어졌다는 그 이름은 직선의 스포츠 당구와 잘 어울린다.

김행직이 처음 큐대를 잡은 것은 3살 때. 부모님이 당구장을 운영했기에 어린 김행직도 큐대를 장난감 삼았다. "당구장 안에 살림집이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당구를 접했어요. 대학 근처라 행직이가 형들 사이에서 귀여움을 받으면서 컸죠"라는 아버지 김연구 씨의 회상은 운명처럼 당구 선수가 될 수밖에 없었던 아들의 인생을 시사한다.

본인도 "유치원 때 6살 무렵까지 놀이터 드나들 듯 당구장에서 놀았던 기억이 있다"고 20년 전을 돌아본다. 그것이 당구인 김행직의 운명적 첫 발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김행직의 당구 인생은 방울로 응결되기 전 수증기로 날아갈 뻔했다. 집안이 당구장 대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게 됐기 때문이다. 김연구 씨는 "6살 때부터 고깃집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행직도 당구장 나들이가 뜸해졌다.

하지만 운명의 줄기는 쉽게 끊어지는 게 아니었다. 5학년 무렵 아버지가 김행직을 이끌고 다시 당구장을 찾은 것. 놀이가 아닌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선수로 키워보겠다는 일념이었다.

아버지 손을 붙잡고 온 김행직은 처음에는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3~6살 때 잠깐 당구를 하다가 말았어요. 그런데 다시 부모님이 취미 삼아 해보라고 권유를 하셨는데 5학년이 뭘 알겠어요. 반 강제적일 수도 있고, 싫었는데 하라고 했을 수도 있었죠. 솔직히 운동을 하면 다른 애들처럼 축구나 야구, 육상을 하고 싶기도 했거든요. 그때 만약 당구를 그만 뒀다면 아마 축구나 야구 선수가 됐을 거예요."

아버지의 열정이 대단했다. 아들의 가능성을 알아본 김연구 씨였다. "오랫동안 당구장을 운영하면서 잘 치지는 못 해도 보는 눈은 있었죠"라면서 김 씨는 "행직이를 보니 끈기와 집중력이 남달라서 키우면 되겠다 싶었어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3월31일 생이라 1년 먼저 학교에 보냈는데 적응을 할 정도로 머리도 좋았어요"라며 아들 자랑을 잊지 않았다.  

처음 탐탁치 않았던 김행직은 가랑비에 젖듯 당구에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한 해 한 해 지날 때마다 재미가 붙었어요. 경기에서 성과를 내고 새로운 세상에 눈이 뜨는 것 같았죠. 아버지 권유로 했다가 나중에는 내가 더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요. 축구나 야구와 달리 당구는 현실적으로 이어진 것이죠. 운명처럼 다가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의로 품게 된 운명은 비로소 응결됐고, 목표를 향한 성장세는 수직낙하하는 방울처럼 가속도가 무섭게 붙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이미 성인 전국대회에 나섰다. "대부분 30~40대 선수들인데 조그만 애가 나와서 신기해 하고 주목도 받았어요."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실력자였다. 중학교 2학년 때 한 성인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그해 전국체전 학생부에서도 정상에 오르는 등 이미 당구계에는 '신동'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중학교 때 국제대회용 대대에서 20점 이상을 놓고 쳤는데 동호인 수지로는 400~500점이었죠. 어른들과 매일 쳤는데 나이에 비해서 놀랄 만한 실력을 가졌다고 입소문을 탔어요."

광명에서 태어나 전북 익산에서 초, 중학교를 보낸 김행직은 경기도 수원 매탄고로 진학한다. 아무 연고가 없던 지역이지만 당구가 있었다. 당구계 인사들의 지원 속에 매탄고에 당구부가 만들어진 것. 당시 부원은 김행직 1명. 오로지 김행직을 위한 창설이었다.

승승장구했다. 김행직은 1학년이던 2007년 스페인에서 열린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2008년 3위로 잠시 주춤했던 김행직은 2010년부터 3년 연속 정상에 올랐다. 당구 역사상 최초의 4회 우승이었다.

이제 막 발걸음을 뗀 성인 무대에서도 당당히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지난 1월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역대 최연소 우승을 차지하더니 4월 이집트 룩소르 월드컵에서 준우승을 거뒀다.

2016년 5월에는 국내 대회 연속 우승으로 역대 최연소 국내 랭킹 1위에 올랐다. 23살의 나이로 지난 2005년 당시 25살이던 고(故) 김경률의 기록을 2년 이상 앞당겼다. 

김행직은 입문 초기 아버지의 지도를 받았다. 이후 실력이 일취월장해 부자의 사제 관계는 짧게 끝났지만 강렬했다. 김연구 씨는 "행직이는 원래 오른손잡이으로 필기나 식사 등 일상 생활은 전부 오른손으로 하는데 당구만 왼손으로 친다"면서 "어릴 때 왼손잡이인 나를 따라하면서 그렇게 됐다"고 귀띔했다.

'슈퍼 대디'의 진가는 지도 때문이 아니었다. 동호인 수지로 250 정도인 김 씨는 지도보다는 뒷바라지에 더 힘썼다. 김행직은 "시작 단계 때는 많이 가르쳐주셨는데 이후에는 뒤에서 지켜만 보셨다"고 했다. 김연구 씨도 "초등학교 방학 때 수소문을 해서 서울 당구아카데미나 청주연맹 회장님의 지도를 받게 보냈다"고 말했다.

본인도 손흥민, 정우성과 비슷하다는 말에 동의한다. "이들처럼 아버지의 지도, 영향이 가장 컸어요. 건방이 아니라 어느 종목이든 대선수가 되려면 일찍 시작을 하더라고요. 축구나 야구처럼 당구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토브욘 브롬달(스웨덴), 딕 야스퍼스(네덜란드), 다니엘 산체스(스페인) 등 4대 천왕도 10살 미만에 시작했어요. 뭐든지 조기 교육이 중요한 것 같아요."

시작은 아버지 때문이었지만 심히 창대해진 나중은 온전히 자신이 일궈낸 것이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당구 선수가 되기까지는 그야말로 스스로 곧게 일어선, 直立의 삶이었다. 스스로 굵게 물방울을 키워 직선으로 내려온 인생이었다. 

입문 초기 몇몇 스승들에게 지도를 받은 것을 빼면 나머지는 독학이었다. 매탄고 당구부에는 스승이 없었다. 하루 8시간에 이르는 개인 훈련을 반복했다. 그러다 2, 3학년 때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황득희의 지도를 받긴 했다. 그나마도 개인 지도는 아니었다. "당시 학원에서 수십 명 수강생들과 함께 선생님에게 배웠죠. 그래도 그때 많이 배웠습니다."

이후에는 그야말로 오로지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스승이 있었느냐는 질문 많이 받지만 100이면 100번 다 개인 훈련을 했다고 말해요. 최근 돌아가신 김경률 선배에게 1년 반 동안 지도를 받았다는 얘기도 나오는데 당구를 가르쳐 준 게 아니라 인생을 배운 거였죠. 혼자 경기 동영상을 보고 혼자 생각하고 훈련하는 걸 계속해왔어요. 그러면 모든 선수가 스승이 될 수 있는 거죠. 왜 코치를 안 뒀나 물어보는데 누군가에게 배운다면 한계치가 그분까지만으로 정해지는 거예요. 그걸 넘어선다면 그분 이상 실력이 빨리 배가될 수 있는 거죠."

고교졸업 후, 당구 특기자로 한국체육대학교 10학번으로 입학할 수 있었지만, 한국체육대학 진학 대신 독일 진출을 택한 것도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다. "훗날 지도자나 교수를 생각했다면 한체대에 갔을 거예요. 내 성적이면 특기자로 충분히 들어갈 수 있었을 테지만 내 꿈은 훌륭한 선수가 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국내에서 경험할 수 없는 유럽 리그를 몸으로 느끼기 위해 독일로 갔죠."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부모님에게 의지할 수는 없었다. 고교 졸업 이후 1년 동안 국내에서 시간을 보낸 것도 후원자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주니어세계선수권대회 출전 때 알게 된 독일 지인(김연구 씨는 '박우식 박사'라고 부른다)의 초청과 고교 때부터 후원해온 한밭큐 권오철 사장 등의 도움으로 꿈에 그리던 유럽 무대를 밟게 됐다.

어렵게 이뤄진 진출인 만큼 한눈을 팔 시간이 없었다. "말 그대로 당구를 치러 간 거니까 하루 종일 연습실에서 살았어요. 매일 12시간을 있었고, 실제로 훈련하는 시간도 10시간 이상을 쳤어요. 당구를 하지 않는 시간에는 경기 동영상을 보면서 연구했죠."

그 세월이 2년이 넘었다. 성과도 눈부셨다. 2010년 6월 독일 당구 프로리그인 한국인 최초 분데스리가 1부리그 호스터에크팀에 입단한 후 빼어난 성적을 냈다. "독일도 외국인 선수 출전은 1명뿐이었어요. 2011년 첫 해는 같은 팀이던 브롬달에 밀려 출전 기회가 적었어요. 그래도 9전 8승1패인가를 했죠. 동양에서 온 어린 친구가 성적이 좋으니까 팀에서도 놀랐죠. 두 번째 시즌에는 브롬달보다 많이 출전했고, 15전 13, 14승인가를 따냈죠. 거의 진 적이 없었어요."

그리고 한국인 최초 네덜란드 에레리그에서 활약 후 귀국하였다.

운명처럼 시작된 당구는 이제 김행직의 인생이 됐다. 삶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무리 아버지 때문에 했다고 해도 내가 좋으니까 당구를 선택한 겁니다. 만약 돈을 보고 했다면 축구나 야구, 골프를 했을 거예요. 내가 좋으니까 계속 당구를 하는 거죠. 지금도 당구를 치지 않으면 경기 동영상을 봐요."

당구에 미치고, 길들여지고, 키워진 삶. 후회는 없을까. 김행직은 우문에 현답 이상의 의미심장한 답을 내놨다. "아직 당구를 쳐왔던 시간보다 칠 시간이 더 많아요. 지금까지는 힘들었던 훈련, 지루하고 밝지 않은 시간을 보냈지만 굉장히 선방했다고 생각해요. 지금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것도, 요즘 성적이 나오는 것도 그렇고요. 10대를 당구에 바쳤으니 20대는 조금 보상을 받는 느낌이랄까요?"

국내 당구 선수의 위상을 높이고 싶은 욕심도 있다. "브롬달이나 쿠드롱 등 4대 천왕 집에 가봤는데 부자처럼 살더라고요. 상금도 우리보다 많고, 클럽 소속으로 수당도 받고 스폰서도 있고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당구만 쳐서 먹고 사는 선수는 손에 꼽을 정도예요. 항상 꿈은 꾸고 있어요. 학교 체육도 당구를 하고 당구 전문 방송도 생겼으니 이미지도 좋아지고 규모도 커질 거고, 향후 몇 년 후면 더 좋아지지 않을까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31년 삶 가운데 20년 이상을 당구와 함께 살아온 김행직. 그 시작은 미약했지만 오로지 당구 하나만을 보며 자신의 이름처럼 바르고 곧게 뻗어온 직선의 삶이었다. '얼마나 고단한 길을 걸어 내려오는' 동안 거대한 빗방울이 된 험난한 여정을 견뎌냈다. 이제 그 직립(直立)의 응결체는 한국 당구 발전의 커다란 물줄기가 되어 흐를 때에 바야흐로 직면해 있다. 김행직은 직립의 당구인이다.

<펌>

 

https://oo70.tistory.com/entry/70~80년대 추억소환

 

친정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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